이사를 하며 집이 좁아져 과감하게 책들을 거의 다 버렸다.
살아남은 책은 5%정도뿐이다.
하루키의 소설도 전부 버렸다. (에세이는 거의 다 남겨뒀다.) 그리고 딱 한권 남겨놓은 소설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다.
아이러니다. 40년동안 프로 문학인으로 살아오며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문호의 수십권의 소설 중에,
그가 처음 쓴 책 한권만을 남겨두다니.
심지어 이 책은 아주 오래된 책으로써,
91년에 출판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당시의 평론가나 문단의 반응을 볼 수 있고,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그의 인터뷰들도 실려 있다. 그가 한 인터뷰중에 심지어 이건 영업비밀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어 좀 놀랐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하루키 소설은 양을쫓는모험인데, 그건 어디갔지?
어쨌든 이 미묘하고 레트로한 표지를 펼치고 그의 데뷔작을 다시 읽었다.
아아. 다시 읽어도, 아니 전에 읽을 때다 훨씬, 정말 좋았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내게
우울함에서 탈출하는 법을 소설로 써서 보여주는 것 같은 작가다.
자기계발서와 정신의학서를 재미있는 소설로 바꿔 보여주는 작가.
그의 식대로 이티가 마법을 쓰듯이 짜잔! 하고 매직을 추가해서.
(이 문장이 너무 오글거려서 아직도 뇌내에 남아있다. 제발 꺼내고 싶다..)
어쨌든, 데뷔작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만큼 잘 쓴 글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40년간 프로 글쟁이인 이 할배는 여전히 이 데뷔작에서 쓰던 소재를 이어 쓰고 있다. 쌍둥이 여자애 다시 보는데 기절할 뻔 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재밌다는 것.
그 부분이 얄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바로 그 부분이다.
그는 문장을 무기로 해서 싸울 수 있는 극히 적은 비범한 작가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문장을 무기로 해서 싸운다,
하루키 답다. 그의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은 사실 소설쓰기를 프로로 훈련해가며 성장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 보다도, 여전히, 그의 문학의 묘미는 문장이다.
번역투의 짧은, 설명하지 않는, 외국어 쓰고 에둘러 말하는, 말장난 하며 시점을 1-2-3인칭을 넘나드는, 하루키 문체 번역기 라는 것이 있을 정도로 명확한 바로 그 문장.
어두운 마음을 가진 자는 어두운 꿈밖에 꾸 않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좋은 문장이다.
하루키 소설에는 이런 부정할 수 없는 명문들이 반드시 하나씩 꼭 나온다.
온 세상이 잠든 한 밤 세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인간은 그 정도의 문장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월드의 탄생이 엿보이는 문장이다.
웃길정도다.
변명같지만 결코 변명이 아닌, 강인한 남자의 체념어린 자신감과 쿨함. 웃긴데 멋있다. 미쳐..
나는 빈약한 진실보다는 화려한 허위를 사랑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이 문장은 사실 좀 놀라웠다.
무려 30년전에 쓰여진 문장인데도, (인용된)
아주 세련된 생각이라고 생각되도록 이야기 안에 배치돼있다. 무서운 신예 루키가 써낸 2021년 소설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제목도 그의 책 중 가장 아름답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은 것보다)
데뷔작이 이렇게 훌륭하다니 놀라웠고,
데뷔작이 제일 훌륭한것이 안타까울만큼 놀라웠고,
문학이란, 노력이란, 프로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는 글이었다.
그의 젊은 원숭이 같은 사진을 첨부한다.
귀엽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를 좋아할 사람
-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사람
- 하루키 소설 중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덜 유치한 것을 찾는 사람
- 무기력한 일상에서 뛰쳐나오고 싶은 사람
-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지만 아직도 그 상실감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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